앨리스 배열 키보드 DIY
"키보드 많이 치니까 손목이 아픈데, 인체공학 키보드라고 나온 것 쓰면 좀 달라지려나?"
몇달 전 와이프가 지나가면서 얘기했다. 문서 작업을 많이 하는 와이프님의 손목 건강이 우려됐지만, 30년전 마이크로소프트 어고노믹 키보드를 썼던 경험이 지름을 주저하게했다.
B키(한글로는 모음 'ㅠ')가 왼쪽에 있기 때문에 자음은 왼손, 모음은 오른손이라는 한글 타이핑의 원칙을 구현하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되면 왼손으로 'ㅠ' 키를 치는 게 어색하지 않다는 카더라도 있긴했지만..
해결책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해보니 '앨리스 배열 키보드'라는 게 있었다. B키가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 있어 MS 어고노믹 키보드의 단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뜻지르기엔 문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본 브랜드 앨리스 배열 키보드도 70~80달러선이었고, 비싼 녀석은 30만원가량이었다. 그동안 인터넷 돌아댕기면서 '자작 키보드'라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결국 DIY로 해결해보기로 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시중에 출시돼 있는 여러가지 앨리스 배열 키보드를 보면서 참조(라고 쓰고 베낀다고 읽는다)할만한 키보드를 찾았다. 대상은 키크론의 Q10. 왜 Q10을 참조 대상으로 삼았느냐하면, 다른 앨리스 키보드는 F1~F12키가 없는 5줄짜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들고 다니면서 쓸 게 아니라면 자판이 온전히 있는 6줄 키보드가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 숫자키는 쓸 일이 많이 없으니 아래와 같은 키크론 Q10이 베끼기엔 딱이었다.
키보드 자작 방식은 크게 PCB를 떠서 만드는 방식과 납땜으로 일일이 배선을 이어 만드는 '풀 와이어링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어차피 PCB 디자인할 능력도 안되지만, 어찌저찌 공부해서 가능하다고 해도 가성비를 추구해야하는 방구석 DIY의 특성상 PCB까지 뜨기는 어려웠다. 그냥 한땀한땀 납땜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다음 고려 사항은 케이스였다. 공개되거나 직접 설계한 도면을 아크릴로 뜨거나 3D 프린터를 이용하는데, 둘 다 여의치 않았다. (3D 프린터 갖고 싶다ㅠㅠ) 그래서 알리를 뒤졌더니 키크론 Q10에 들어가는 보강판이 나왔다. Q10 사용자가 더 단단한 키감을 느끼기 위해 추가하는 식의 커스텀용인데, 이 녀석을 이용하면 어떻게 별도의 케이스 제작 없이도 DIY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가지 고민 끝에 위와 알리에 위와 같이 주문했다. 키감이고 뭐고 일단 생각대로 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PoC 개념으로다가 키보드 스위치도 100개 6000원쯤하는 싸구려로 시켰다. 키보드 동작용 MCU로는 라즈베리파이 피코를 골랐다. 키캡도 한글 자판이 프린트 돼 있는 싸구려로 골랐다. 대충 23달러쯤 들었다. 여기에 1N4148 다이오드 100개(개당 20원)를 한국에서 배송비 포함 5000원에 샀다. 총 비용은 3만7000원쯤 되겠다.
일단 관건이었던 보강판. 단단한 재질인 줄 알았지만 낭창거렸다. 사람들이 괜히 아크릴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는 키보드 구멍에 딱 들어맞았다.
느긋하게 즐기며 DIY하려했던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키캡이 배송된 것을 보고 아들이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키보드 만들어서 엄마한테 선물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같이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리 만들라고 야단이었다. 우선 키보드 보강판에 키보드 스위치를 꽂는 일을 맡겼다.
보강판에 스위치를 다 꽂은 뒤엔 테스터로 일일이 체크해봤다. 스위치에 바로 납땜할 것이라 불량이 나면 후처리가 고역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불량 스위치는 없었다.
그리고 무한 납땜 시작. 스위치의 두 접점 중 한 곳에 다이오드를 납땜한 뒤 길게 이어줬다.
가로 방향은 다이오드 다리를 이용해서 이어줬지만, 세로 방향은 마땅한 선재가 없었다. 배선을 까지 않아도 인두기 갖다대면 피복이 녹는 에나멜 동선을 이용해 세로 방향 납땜. 각 행렬을 라즈베리파이 피코와 연결하는 것도 에나멜 동선을 이용했다. 느긋하게 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계속 쪼아댔다. "아빠 언제 납땜할꺼야?" "빨리 납땜해" "쉬지말고 계속해"... 키가 100개쯤 되니까 각 키당 2개 포인트씩 200번, 여기에 행렬 및 라즈베리파이 피코 납땜까지 합치면 한 300번쯤 납땜한 것 같다.
납땜이 끝난 후 키캡 부착은 아들이 하겠다고 했다. 위치를 알려주면서 하나씩 꽂았다.
이렇게 키캡 부착까지 완료. 키크론 Q10에선 왼쪽 맨 위 ESC자리에 볼륨조절 등의 용도로 쓰이는 로터리 엔코더가 부착돼 있었는데, 이 자리를 ESC로 채웠다. F1~F12키를 한칸씩 왼쪽으로 당겨주고 맨 끝에 하나 남는 곳에는 PgUP 키를 넣어줬다. 이후 테스트 과정에서 잘 안먹는 키가 나오면 새로 납땜해주는 작업을 반복했다.
하우징은 뭐 차차 생각하기로하고, 아래쪽에 다이소에서 1000원 주고 사온 폼보드를 대충 잘라 붙였다. 배선도 대충 정리한 뒤 아래쪽에 라즈베리파이 피코도 붙였다. 라즈베리파이피코엔 KMK 펌웨어(https://kmkfw.io/)를 씌워줬다. 예제가 잘 나와있어 펌웨어 만드는 작업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아들은 본인이 만든(?) 키보드를 테스트해보며 즐거워했다. 만든 키보드를 컴퓨터와 연결해 '아들 바보 메롱'이라고 쳤더니... '아빠 바보 멍청이 쥐밤톨'이라고 썼다. 본인이 알고 있는 가장 나쁜 욕이란다.
이렇게 앨리스 배열 키보드 자작 프로젝트 1탄은 끝났다. 아들과 함께 뭔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번 DIY는 취미 생활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나중에 아들이 더 크면 아빠랑 이런 활동을 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번에 자작하면서 ①스위치에 바로 납땜하니 납땜 포인트가 바닥에 닿아 납땜이 끊어지는 점 ②구린 키감 ③ 대책없는 케이스 등의 문제점이 나왔다. 그래서 2탄을 준비 중이다. 스위치에 바로 납땜하는 대신 핫스왑 소켓에다 납땜하면 납땜 포인트 보호가 더 잘될 것 같다. 케이스 문제도 3D 프린팅을 맡기든, 레진으로 만들어보든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